90년대 한국팀 대형 스트라이커의 대명사

 

영욕의 한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 황선홍..

그가 걸어온 선수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나,  2002년 그는 영욕의 날개를 접고 홍명보와 함께 아름다운 퇴장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황선홍의 후계를 논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로서 그를 추억하고 있다.

 

신인-유망주-시절의-황새-황선홍
유망주 시절의 황선홍

 

프롤로그 - 황새의 출현, 그리고 飛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

우리는 황선홍이라는 걸출한 신예의 쐐기골로 월드컵 예선 최대의 난적 사우디를 격파한다.

 

당시 최순호, 김주성을 보유한 한국에 대한 아시아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당시 우리는 예선전 1무 외 전승이라는 역대 예선전 사상 가장 완벽한 최강의 면모로 예선을 통과했다.

 

최순호가 노장으로서 최전방 스트라이커 대신 링커의 역할로 팀 전체를 조율하기 위해 2선으로 빠진 상황에서 김주성이란 '야생마'가 등장했지만, 왼쪽 측면을 담당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최순호의 계보를 이을 것으로 여겼던 '멕시코청소년대회 4강의 주역' 김종부가 스카우트 파동으로 사라질 즈음, '황새' 황선홍의 등장은 그야말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황새는 90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전에서의 화려한 '비상'으로 그의 출현을 알리기 시작했다.

 

좌절, 부상, 그리고 마지막 날개짓

 

94년 미국월드컵 직전까지 우리 선수의 유럽 진출은 김주성(독일 보쿰)이 유일했다.

그런데 황선홍이 이탈리아 2부리그에서 활약하면서 미국월드컵에서 골게터로 또 다시 많은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94 미국 월드컵 이때의 기억은 왠만한 팬이라면 다 기억하듯 황선홍은 기대만큼이나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아마 16강진출의 가장 좋은 기회였던 볼리비아전에서 번번히 기회를 날려 버린 탓이었다.

 

이때 한 골이라도 들어가 1:0이 되어 승점을 챙겼더라면 우리의 원정 16강은 남아공 월드컵 이전으로 앞당겨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미국 월드컵 이후 그는 엄청난 비난, 그리고 잦은 부상에 시달려 잊혀져 가는 듯했다.

 

2002-한일-월드컵-개막전-폴란드와의-경기에서-선취골을-넣고-환호하는-황새-황선홍
폴란드 전에서 선취골을 넣고 환호하는 황선홍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소속팀 포항에서 용병 라데와의 활약과 A매치에서의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다시 재기에 성공한 황새는,, 1 A매치 한 게임 8골 신기,록(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네팔전에서 혼자 8골을 넣어 A매치 1경기 최다골 기네스북에 등재. 약팀과의 경기였지만 A매치 한경기 개인 최다골 신기록), 일본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에서의 멋진 헤딩골, 일본 킬러로서 J리그 득점왕 등극 등..

 

 

그렇게 그는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위해 다시 날개짓 했고 우리는 다시 그를 맞아들였다.

하지만 본선 직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소림축구에 당한 부상으로 인해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마지막 월드컵이 될 수도 있었을 98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또 다시 좌절을 딛고 일어섰고, 마침내 히딩크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2년 그의 마지막이자 우리의 영광의 한일 월드컵에서 마지막 날개짓으로 비상한다.

 

제2막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제2의 황선홍?

 

황선홍의 지명으로 후계자로 지목된 이동국선수의 희박한 국대 복귀 가능성과 '리틀 황새'로 일컬어진 조재진선수의 은퇴로 제2의 황선홍은 누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직도 황선홍의 후계를 기다리고 논한다는 것은 그만큼 황선홍선수를 추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박주영이 있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박주영은 황선홍의 후계자라기 보다 후일 자신의 후계를 논하게 될 존재로 부상하리라 기대하는 다른 유형의 선수라고 생각한다.

황선홍은 한국 축구사에 있어 90년대 이르러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대형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현재 유럽 빅리그 유만주인 지동원과 손흥민선수가 단절된 황새의 후계를 이어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현재 황선홍은 축구해설위원으로 포항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축구인생의 2막을 걸어가고 있다.

오늘 현재 K리그 순위에서 포항이 4승2무로 1위를 달리고 있다.

부디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2막을 마무리하고 한국축구에 많은 기여를 해줄 것을 기대한다.

추억할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것이 팬으로서는 행복한 일이니까...

 

에필로그 - 황새, 그리고 히딩크

 

학교 급식만으론 원하던 체중을 만들 수 없자 황선홍은 궁여지책 끝에 경기 직전 배 터지도록 많은 양의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배라도 채워 몸싸움에 밀리지 않겠다는 그의 비장한 각오였다.

출렁거리는 뱃 속의 물 때문에 간혹 뒤뚱거려야 했던 그를 보며 당시 용문고 선배들이 황씨 성을 가진 그에게 지어준 별명이 바로 '황새'였다.

 

다음은 2002 한일 월드컵 직후 은퇴를 선언한 황선홍에 대해 히딩크가 이야기 한 내용이다.

 

2002-한일-월드컵-당시-4강-신화를-이끈-히딩크-한국팀-감독
히딩크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착이 있다.

그러나 황선홍에게 조금 더 애착이 가는게 사실이다.

그는 팀의 베스트로써 항상 혼자 아픔을 뒤집어썼다.

언제나 비난의 대상은 나 아니면 그였다.

 

내가 알기로 그의 가족사는 좋지못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떠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마저도 A매치 중에 돌아가셨다.

그는 그리움에 차있었다.

그래서 공을 찼다고한다.

응원 나올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으면 그에게 좀 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에 0:5 대패 하던 날.

그는 내 숙소에 찾아 밤을새워 울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잘 다독거려주었다.

그는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같았다.

 

그런데 은퇴라는 것을 결정하다니.. 나는 그가 안타까웠다.

조금 더 일찍 좋은 팀에서 체력과 개인 스피드를 연습했다면 그 누구보다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황선홍도 사랑하지만, 모든 선수들을 다 사랑한다.

 

- 거스 히딩크 -

 

(본 포스트는 제가 '황새' 황선홍의 선수시절과 당시 우리팀에 대한 이야기를 제 개인적인 관점과 감상으로 정리해 본 글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것이니 혹시 피드백을 해주시면 언제든 정정, 보완하겠습니다)

 

P.S :: 이 포스트는 필자의 다음 블로그였던 '싸커엔젤'에 2011년 4월 18일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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