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와 중국·대만 양안 간 긴장이 고조되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교훈을 통해 총력적 자주국방이라는 경각심 제고가 매우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6.25 당시 한국군의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된 용문산·파로호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포스팅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주제로 오늘은 우선 가히 '현대판 행주대첩'이라 불릴만한 용문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런데 용문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우리 국군의 현대전 최대 흑역사이면서도, 곧이어 벌어질 6 사단의 대역전 승전 신화를 만들어낸 용문산·파로호 전투의 서막이 되었던 사창리 전투를 먼저 이해해야 하므로 일단 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6사단의 굴욕적인 패배, 사창리 전투

 

1951년 4월 국군 제6 사단과 미군 제9 군단은 중공군 춘계 공세를 저지하는 중부 전선 방어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전선을 북상시키려 했으나 도리어 중공군의 대규모 남하 소식이 전해지면서 방어 진지 구축이 시급해진 상황에서 당시 사단장이었던 장도영 준장은 제19 연대를 좌측 광덕산에, 제2 연대를 우측 두류산에, 그리고 예비대로 뒤따르던 제17 연대를 사창리 일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도록 배치했다. 

 

그러나 야습을 틈타 기척 없이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 제60사단의 대부대와 마주한 2 연대는 급격히 혼란에 빠져 패주 하기 시작했고, 19 연대 역시 진지를 포기한 채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적 진지를 공격하기 전 통상적인 준비 포격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나타난 적을 마주하자 6사단의 선두에 있던 이 2개 연대는 급속도로 공황상태로 빠져든 것이었다.

 

6사단 예비대로 남아있던 제7 연대로 하여금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도록 했으나 이 역시 얼마 안 가 패주 행렬에 무질서하게 합류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유엔군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던 영연방군 제27 여단이 3일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가평을 사수함으로써 유엔군이 다시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어 중부 전선 전체가 와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당시-가평-전투에-참전했던-영연방군-호주대대-소속-병사의-전투-장면
가평 전투에 참전했던 slim madden 일병.(영연방군 호주대대)

 

6사단의 문제는 무질서한 상태로 패주 하면서 70%에 달하는 수많은 장비들을 중공군에서 빼앗겼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빨리 도망치는 바람에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는 모면하여 병력 손실은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사단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이러한 패주는 결국 미 제1, 제9군단까지 후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방어 전선이 뚫림으로써 자칫 주변의 아군마저 고립될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전선 전체를 뒤로 물려 재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불명예스러운 패배감과 자괴감, 그리고 아군인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들로부터의 조롱은 6사단 병사와 장도영 준장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러한 굴욕감에 6사단의 사기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를 갈면서 설욕을 위한 복수전을 단단히 벼르는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사창리·현리 전투는 국군의 치욕적인 흑역사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이어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둘 통쾌한 대첩의 서막이 될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화력이 부족했던 한국군만을 골라 집중적으로 각개격파 공격하던 중공군들은 곧이어 자신들에게 닥칠 끔찍한 지옥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음 전투에서 또다시 한국군만을 고르다가 복수에 이를 갈던 이 6사단을 만나게 된다.

 

 1개 사단이 거둔 현대전 최고의 승전, 용문산 전투

 

1951년 5월, 드디어 중부 전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용문산 전투가 시작된다.

이 전투의 아군 주역은 바로 사창리 전투로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이를 갈던 국군 제6사단!

 

폭풍전야

 

그동안 대규모 공세로 취약한 곳을 돌파하여 주변을 포위, 각개격파하는 중공군의 전술을 역이용,

최소한의 병력으로 일단 중공군의 예봉을 꺾은 다음 2, 3선으로 끌어들여 역 포위 섬멸하려는 유엔군 전술에 따라 장도영 사단장의 지휘 아래 6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 대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용문산 방어 진지를 구축을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배치하게 된다.

 

  • 용문산 일대에 6사단 제2 연대를 배치한다
  • 사실상의 주방어선보다 더 앞으로 나간 최일선의 2 연대가 가정 먼저 중공군의 예봉을 꺾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 중앙 427 고지에 2 연대 제2대대, 우측 나산에 2 연대 제 1대대, 좌측 울업산에 2연대 제3대대를 배치한다. 
  • 6사단 제2 연대는 단순히 예봉을 꺾으며 희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방어 진지를 사수하고, 부득이 작전상 후퇴 시 질서를 유지하며 적을 유인한다.
  • 후방에는 6사단의 다른 예비 연대가 배치되어 있고, 6사단 이후에는 미군과 다른 아군 사단이 2, 3선에 포진하여 유인된 중공군을 섬멸할 작전 계획이다.
  • 아군의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포병 전력인 7개 포병 대대가 화력이 지원될 것이다. 

 

방어-진지-고지에서-적의-동태를-살피는-한국군
고지 방어 진지에서 관측하는 한국군

 

2 연대의 결사 의지

 

5월 17일 마침내 야습을 틈 타 동시다발로 북한강 일대 전역에서 중공군이 도강하여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대규모에 걸친 공격이기보다는 위력 정찰 등을 통해 용문산 일대 방어 부대가 한국군 부대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방어 부대가 한국군이라는 것을 확인한 중공군은 18일부터 2개 사단으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한다.

이러한 적 2개 사단을 6사단 2 연대가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아마도 중공군은 이때만 해도 결과를 매우 낙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6사단은 이미 더 이상 사창리 전투에서의 6사단이 아니었다.

또한 기어들어온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용이한 형태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굳건히 버티는 가운데 아군 포병 화력과 미군의 항공 지원도 있었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고 해도 집중된 화력을 다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력 지원이 된다 해도 캄캄한 밤중에 터진 조명탄에 비치는 새카맣게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본다면 정신이 아득히 와해되어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물러서지 않고 근접전과 백병전도 불사하며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는 것은 당시 이때 6사단 병사들의 결사 의지가 얼마나 대단하고 결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연대가 지키는 곳을 주방어선의 주력으로 오판한 중공군은 1개 사단까지 증원하여 3개 사단으로 공격하였으나 한국군 1개 연대 병력이 지키는 방어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2 연대가 이렇게 분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했다.

2 연대의 처절하고도 결연한 분전은 한국군만 골라 상대하려던 중공군을 크게 당황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6사단은 2 연대의 선전으로 나머지 7 연대, 19 연대 이 두 개의 예비대를 축차 지원 투입하지 않고, 끝까지 남겨두고 있었다.

 

결과를 쉽게 낙관하던 중공군 3개 사단은 크게 당황했다.

3개 사단 전 병력으로 밀어붙이다가 지치기 시작한 데다 보급도 원할치 않자 중공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넘어왔던 북한강을 거슬러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통렬한 반격

 

5월 21일 새벽, 6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드디어 아껴두었던 7 연대와 19 연대에게 2 연대와 함께 추격 명령을 내린다. 

중공군의 예봉을 꺾고 유인, 섬멸하려던 작전 계획보다 더 잘 싸워 선봉에서 적을 퇴각시키고, 전열이 무너진 적을 추격하며 섬멸하게 된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던 한국군의 강력한 저항, 게다가 이제는 한국군의 추격에 포위당하여 전멸될 위기까지..

이때부터 중공군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미 심리적으로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창리·현리 전투와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무질서하게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도망가던 중공군은 양평에서 가평, 춘천을 지나 화천발전소까지 대략 60km를 추격해 온 한국군에 의해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화천호까지 도망쳐온 중공군은 여기서 또 한 번 한국군 제6 보병사단에 의해 끔찍한 지옥을 맛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인 '파로호 전투'이다.

 

다음 편에서는 바로 이 역사적 승전의 역사인 파로호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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